정준일 [620760] · MS 2015 (수정됨) · 쪽지

2017-09-28 20:10:59
조회수 13,090

오수생의 푸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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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 최고기온이 23도였다고 합니다.
자주 가는 카페에 들러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는데 유난히 서늘하더니,
가을이 완연해지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들도 이 서늘함이 푸르게 가슴팍에 스미는 느낌에 

저처럼 기분이 싱숭생숭하신가요.


수능만 다섯 번째를 맞는 저는 하루 아침에 기분 좋게 시원해진 공기가 이젠 그리 달갑지도 않지만, 올 한 해 제가 밟아온 발자취를 돌이켜보며 이내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펜을 쥐러 가곤 합니다.
.
다섯 번.
이리도 깊게 파야했던 우물이었던가

친구들은 바쁘게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제대하고
밤을 새며 미래를 준비하고 밤을 새며 추억을 새길동안

저는 남들의 시선 속에서 헤엄치는 일도 벅차
늘 숨고 참고 웃음 대신 우울감을 목구멍에 쑤셔넣고 살아왔습니다.
.
.
원서.
삼수때는 연고대를 가고 싶었습니다.
사설 컨설턴트와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세 개의 의대를 넣고 광탈한 게 큰 전환점이었어요.

사수.
돈을 벌어야 겠다.
독재학원 수학 조교를 하고
거기서 나름의 인정을 받으며
두 건의 과외도 잡혀, 돈도 벌고
내가 누군가를 이끌어주는 일에 행복을 느끼고
그러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장애물.
난독증
활자를 읽으면 숨이 막혔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생각이 나질 않아서.

4번째 수능.
이상하게 꼬이던 생각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학습되었던 무력함
평소보다 훨씬 낮은 점수

사랑.
밑바닥까지 추락한 내게
손을 놓지 않던 저희 부모님

추악한 나의 내면까지도
이해해주던 최고의 친구

같이 수능을 친
여동생을 데리러 가신 부모님 대신
수고했다며 나를 토닥여준
현관문 앞
우리집 강아지
.
무너지기엔 젊고
이겨내기엔 어린 나이
.
처음 입학한 대학교
새로이 만난 인연과
조금은 더 커진 내 세상

부산을 떠나 상경하고
수험비용이 죄송해
부모님 몰래 시작한 알바
.
떨어져보니
힘들어보니
사랑한다는 말
보고싶다는 말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쉽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다섯 번째 수능이 코 앞에 왔네요.

복잡하고 거대한 삶의 흐름 속
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끝은 아름다울까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지만
사랑하고 사랑받고
아프고 견뎌내고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저라는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찰나의 순간들이 이 서늘한 공기에 담겨 있는것 같습니다.

수험생 여러분

수능은 큰 시험이더군요.
그 자체가 가진 고됨,
그리고 현실적인 영향력을 넘어
삶에 대한 태도와 부모님의 사랑, 헌신을
가장 크게 일깨워주는
어느 가을 하루의 축복이었습니다.

떨고, 불안해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그에 못지않게
천천히, 꾹꾹,
남은 시간을 눌러 담아 행복하게 살아보십시오.

아직까지 놓지 않은 이 공부의 의미에 대하여
내 삶을 구성하는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내가 살아갈 , 걸어갈 길에 대하여
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생각하며
미친 입시의 시간임과 동시에
찬란하고 깊어 의미있는 시간이기도 하셨으면 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마지막까지 의미있는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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