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ot, Market, God
1.
처음으로 치렀던 01학년도 수능은 지금까지도 역사상 가장 쉬운 수능이었고, 그 다음해 02학년도 수능은 조금만 더 있으면 30번을 채울 수능 역사상 2-3번째로 어려운 수능이었다. 대학의 문턱에서 입시에 담금질 당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 오르비였고, 그것이 내 인생 앞부분 절반의 업이 되었다. 이렇게 입시의 회오리에 끌려들어가 20학년도 대입 배치표까지 만들고 있게 될 줄은 내가 처음으로 02학년도 배치표를 만들 때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2.
05년 무렵부터 주식시장에는 기웃거렸지만, 본격적으로 십억원 이상의 자본을 주식시장에 노출시켜본 것은 07년 들어서였다. 07년은 21세기 최고의 버블을 향유하던 해였다. 중국 증시는 매년 두 배씩 폭발했고 차입을 걸어 부동산을 사놓은 사람은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집을 사면 올랐고 오른 차익에 대출을 섞어 집을 사면 또 올라서 대출금이 사라지고 집만 남았다. 과감한 사람들은 그렇게 남은 집들을 담보로 잡아 집을 몇 채 더 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동산이나 증시 위에 올라탄 사람들은 돈을 아무리 써도 자본이 줄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해, 80년만에 가장 가혹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 주식시장의 주가지수가 하루 사이에 20%씩 위아래로 움직였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 오면 계좌 잔고가 억 단위로 떨어졌다. 97년 IMF때 한국 재벌들이 파산하듯 08년에는 미국 투자은행들이 줄도산했다. 자고 일어나면 또하나의 911테러를 겪는 것과 같았다. 주식, 채권, 원유, 농산물은 물론이고, 통상의 위기에서는 가격이 올라야 하는 금까지 값이 떨어졌다. 모든 자산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개장 전 미국 S&P 선물에 -5%의 하한가 제한이 있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그렇다고 모든 자산을 팔아치우고 현금을 들고 있을 자신도 없었다. “주식회사 미국”마저 파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전세계를 감싸고 있었기에 현금을 들고 있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71년 닉슨이 금태환제를 폐지한 이후 미국이 파산한다면 달러 지폐는 휴지만도 못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휴지는 똥을 닦는 데라도 쓰지, 달러는 여러 사람 손을 탄 것이라 더러우니까. 국가부도가능성을 반영하는 국채 CDS가 모든 국가에서 치솟았고 한때는 연어기름이나 파는 어촌이었다가 금융업으로 떼부자가 됐던 아이슬란드는 경제적으로 뇌사했다. 그리스도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해 ECMO를 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차례는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라고들 했다. 미국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달러를 팔고 엔을 샀다. 08년과 09년에는 하루에 3시간씩 자가며 전세계 파생상품 거래를 했다. (그 와중에 09년 1월 의사고시를 치러 다행히 합격을 하기도 했다.) 1년새 심장에 굳은 살이 많이 배겼다. 입시처럼 온탕과 냉탕에 담금질을 당하고 결국 금융도 인생의 업이 되었다.
3.
옵션 그릭들(option greeks)은 나에게 온도와 습도, 자동차의 속도와 엔진의 RPM처럼 친숙하다. 가령 옵션 그릭 중 “Charm”은 ∂Θ/∂S이니까 -∂²V/∂τ∂S이고 다시 풀어쓰면 -∂/dτ * ∂V/∂S니까 -∂Δ/∂τ와 같은 것이다. 옵션 그릭 Δ(델타)는 그릭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값인데(18학년도 사관학교 선물거래 지문을 이해하는 데 든 시간의 20배 정도를 더 들이면 이해할 수 있는 변수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면 만기일을 향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값이 작아지게 되어 있다. Charm은 그 값이 작아지는 속도를 측정하는 그릭이다. 이따위 그릭들은 주로 리스크를 0으로 (그리고 그에 따른 기대수익도 0으로) “헷징”하거나, 반대로 리스크를 감수하며 이익을 취하고자 할 때 내가 보유한 리스크를 수치로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다.
07년부터 5년 동안은 옵션 체인만 바라보고 살았다. 장중에 옵션 체인을 띄워놓고 감마, 베가, 세타값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오케스트라의 화음 같은 것이 들린다. 어떤 날은 포르티시모, 어떤 날은 디크리센도, 오늘같은 날은 “푸리오소”(미친듯이)다.
보통 사람도 온도를 숫자로 보면 공감각을 느낄 것이다. 40도라고 하면 땀에 쩐 냄새가 느껴질 것이고, -30도라고 하면 숫자만 봐도 몸의 털이 곤두설 것이다. 나는 내재변동성(implied volatility)이라는 값을 보면 그런 공감각이 느껴진다. 내재변동성은 향후 기초자산(보통은 주가지수)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폭이 어느 정도 될 것으로 시장 참가자들이 예측하는지를 계산한 값이다. 흔히 공포지수라고 부르는 VIX지수가 내재변동성과 거의 같은 의미다.
VIX지수가 13이면 그런 숫자에서는 은은한 커피향 따위가 난다. 천천히 주가가 오르거나,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고 브라운 운동을 거듭하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장. 장중에도 증권맨들은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 시장은 너무 조용해서 오늘은 어떤 호구에게서 돈을 뜯어내볼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증권사 영업사원들의 대뇌의 축삭돌기 안쪽 이온채널로 칼륨 이온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린다.
25 정도의 VIX지수에서는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펀드매니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아직 환매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추가 매수를 해야 한다고 고객들을 타이르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장중 내내 긴장한 주인의 등에 쩍 달라붙었던 와이셔츠는 주말에 세탁소 아저씨가 넘겨받아 탁탁 털면 섬유에서 소금이 쏟아질 것이다.
40과 같은 VIX를 보면 경찰차 사이렌 소리와 함께 피에 젖은 바디백 같은 것이 보인다. 이미 몇십명이 투신했다. 시장에는 벨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펀드 환매를 상담하는 고객들의 전화가 아니라 선물계좌에 현금이 떨어졌으니 1시간 안에 증거금을 채워넣지 않으면 모든 포지션을 반대매매해버리겠다는 이미 목이 쉰 증권사 직원의 마진콜일 것이다. 블룸버그와 야후 파이낸스에서는 하루종일 브레이킹 뉴스 자막만 떴기 때문에 다음날 새벽 뒤척이다 꿈 속에서 혜성이 지구로 돌진중이라는 CNN 뉴스를 들어도 이제는 양치기소년의 피리소리처럼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4.
나는 처음부터 개별주식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건실한 회사, 우량주를 찾아내고 가치투자를 하는 일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 상장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사람들의 옷깃소리와 “인간”들이 내는 목소리, 유니콘 스타트업의 등장, IT버블, 바이오 테마주, 작전주, 재무제표… 모두 내 관심과 먼 영역이다. 아마도 나는 태생적으로 인과율을 싫어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개별주식을 두고 사람들이 논하는 인과에의 집착이 불러일으키는 냉소를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거라고? 그거 나에겐 R=.35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2010년대 이후 시장에서의 거의 모든 거래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 사고 파는 거래다. 소수의 인간들이 도박처럼 speculation(한글의 ‘투기’와는 좀 다른 의미인데 별 수 없이 투기라고 번역된다. 그렇게 나쁜 뜻 아니다.)을 하고 때로는 가치투자라고 생각하며 speculation을 한다. 그 몇%를 제외한 구십몇%는 로봇이 만들어내는 거래다. 로봇도 2010년대의 로봇은 사람이 사전에 정해둔 공식에 따라 움직이고, 2020년대의 로봇은 더 이상 사람은 이해할 수는 없는 논리로 판단한다.
5.
내가 주식시장에 풀어놓은 로봇에는 “if문”이 하나도 없다. “HIS decision”을 존중하지만 왜 그가 그렇게 판단을 내렸는지 나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인과율을 별로 믿지 않는다. 절반은 태생적인 취향이고 절반은 의학교육을 받으면서 학습된 것이다. 과학은 통상의 인간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쉽게 인과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도록 허락해주지 않는다. 대부분은 대략적인 상관관계가 있을 뿐이며 그조차도 관계가 있다 혹은 없다고 확정을 해주지 않고 R값(피어슨 상관계수)으로 그 그래디언트를 표현할 뿐이다. 그런 과학적이고 통계학적인 결론은 황당하게도 오히려 종종 비직관적이고 반이성적인 것으로 오해받고 공격받는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원인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비직관적이고 반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할까. 주식을 거래하는 로봇을 개발하고 운용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적이 있다. 인간은 인과관계가 없는 것에서 인과율을 찾는다. 본능적으로 모든 것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무언가가 원인이라고 생각해야만 안심하고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인과는 커녕 상관관계조차 없는 것일지라도. 죄를 저지른 원인 즉 그 행위가 고의인지 과실인지를 알아야 유죄와 무죄 내지는 옥살이를 할 기간을 판단할 수 있다. 판단하기 애매한 상황을 위해 미필적 고의라는 개념까지 만들어냈다. 꽤 많은 경우 의사는 환자를 결국 치료해 내긴 하면서도, 사실 환자가 무슨 병을 앓았던 것인지, 어떤 경과로 치료되었는지 잘 모른다. 오늘 비트코인이 폭락하건 폭등하건 거기에는 아무 원인도 없다. 내일 주가지수가 오르든 내리든 나는 그 이유를 그럴듯하게 지어낼 수 있다. Fed가 이자율을 올리면 주가는 내릴 수도 있고 오를 수도 있다. 주가가 내리면 금리가 올랐으므로 위험자산 선호가 줄며 디레버리징이 일어난다는 교과서적인 이유를 들이댈 것이고, 주가가 오르면 금리를 올린 것은 시장의 강한 기초체력에 대한 자신감을 관계당국이 보여준 것이므로 주식이 올랐다는 핑계를 댈 것이다. 그놈이 나를 버리고 간 데에는 사실 아무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그자식이 B형이어서 그렇다는 이유라도 붙여야 안심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모든 것에 이유를 붙이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신 아닐까? “HIM”이 없다면 내가 왜 존재하고 왜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다는 괴로움을 이겨낼 수가 없었을테니까.
6.
로봇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인과율을 찾아내고 싶은 욕망에 맞선채, 인과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알아낼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시인하고, 그 첨탑같이 뾰족한 불확실성의 맨위에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나의 모든 것 곧 내 자신 그 자체와도 같은 내 “자본”이라는 유리잔을 올려둔 채로 잠을 청하는 반(anti-)인간적인 불안에 적응하는 과정이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식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유능하고 양심적인 CEO를 찾아내거나, 매년 1000%의 속도로 성장할 플랫폼을 가진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을 남들보다 먼저 발견해내거나, 재무제표와 계산기를 옆에 두고 EV/EBITDA, PBR, ROI를 계산하거나, 차트를 펼쳐놓고 RSI니 MACD니 하며 캔들 그래프의 고점과 저점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가며 엘리어트 파동을 찾아가는 일일 것이다.
주문을 던지고, 낚아채고, 취소하는 90% 이상의 로봇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브라운 운동 사이로, 심장을 가진 인간들이 내뱉는 공포와 탐욕의 숨이 모여서 일으키는 나비의 날갯짓이 있다. 날갯짓은 이따금 시장에 파동을 만들어낸다. 지진파와 같은 진동수를 가진 건물이 지진파에 공명하여 무너지듯이 날갯짓이 일으키는 파동과 공명하는 주문을 흘리면 파동은 지진에 무너지는 건물처럼 와르르 깨지고 깨진 조각들은 모두 내 계좌의 현금이 된다. 공명 주파수는 존재하지만 어떻게 계산되었는지는 모른다.
7.
주식시장에는 떨어지는 칼을 잡지 말라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요즘같은 하락장에 섣불리 매수하러 뛰어들지 말라는 뜻이다. 실제로 떨어지는 칼을 받으면 심장에서 피가 흐른다.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30시간을 깨어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칼을 받아내며 흘린 피의 양이 다시 시장이 이성을 찾았을 때 (그때까지 과다출혈로 죽지 않고 다행히 살아있다면) 보상받는 현금의 양에 비례한다.
떨어지는 칼을 받아내면 사람은 피를 흘린다. 그런데 쇠와 전기밖에 없는 로봇이 받아도 그럴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주가지수인 미국 다우존스 지수는 어제 역사상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지고도 오늘 또다시 일주일째 폭락을 거듭한다. 아직 죽은 사람이 없다면 주가가 너무 빠른 속도로 떨어져서 죽을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극심한 우울증 환자도 우울의 극단 속에서는 오히려 자살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살을 감행할 기운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8.
이번주 내내 이제껏 본적이 없는 강한 신호를 “HE”가 뿜어낸다. 트랜지스터에는 피가 흐르지 않아 이토록 거침없이 칼을 받아내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VIX지수는 49.13이다. 숫자에서 진한 피비린내가 난다.
*Update 1: 이 글이 쓰인 시점으로부터 4거래일 후 로봇에 의해 운용되는 계좌 잔고와 수익률이 공히 역대 최고값을 갱신했다.
*Update 2: 그 다음주부터 시작된, 사상 최악의 폭락장을 버텨내고 그로부터 4개월 후 모든 계좌는 이전의 최고값을 넘어 또다시 최고값을 갱신. 전세계 주식시장 붕괴 직전인 2020년 3월 9일에 새로 운용을 시작한 계좌는 올 봄 내내 지속된 극심한 변동성을 평화롭게 향유하며 5개월 동안 +270%의 수익률을 기록하였음.
*Update 3: 8개월이 지난 현재 위 계좌의 수익률은 +500%을 기록중. 현재까지 누적 수익은 100억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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