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잡지식 33 : 광개토왕비(5)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한국 학계든 일본 학계든 중국 학계든,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텍스트는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는가?의 문제죠.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항상 사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부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래 글이라는 매체는 문맥(context)을 갖게 마련입니다.
글에서 하나의 문장을 갖고 온다면, 설령 그 문장을 완벽히 해석한다 하더라도 글 전체의 진의는 알 수 없죠.
광개토왕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광개토왕비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왕릉의 앞에 세워진 비라는 특성상, 왕의 업적을 과장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더불어, 광개토왕비의 내용은 일관적인 양상에 따라 구성됩니다.
대내외적인 환란->광개토대왕의 평정->평화의 도래
이러한 양상에 비추어 본다면, 신묘년조의 기록은 '대내외적인 환란'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한편 신묘년조는 비문의 위치상 연도 흐름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신묘년조 기록은 391년인데, 앞서 나오는 '광개토대왕의 평정' 기록은 395년의 거란 정벌, 뒤에 나오는 '광개토대왕의 평정' 기록은 396년의 백제 정벌입니다. 즉, 391년의 일이 395년과 396년의 일 사이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것입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신묘년조 기록은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삽입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는데 왜 일본의 위세를 강조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는 천하를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인식했습니다.
1차적 천하 : 고구려의 직접 지배 영역
2차적 천하 : 고구려에 종속된 지역 ex) 백제, 신라, 부여 등
3차적 천하 : 외부 지역 ex) 중국, 왜 등
이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백제를 자신들의 아랫것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죠.
이 천하관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 등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속국 간의 분쟁을 의미합니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속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부정적 이미지로 이어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광개토왕비의 기록자들을 백제가 벌인 일을 일본이 벌인 일로 대체하였던 것입니다.
속국 간의 대립을 광개토대왕이 진압했다는 것보다는, 외부 세력에 의한 속국의 혼란을 광개토대왕이 평정하였다는 것이 광개토대왕의 이미지에는 훨씬 좋을 테니까요.
신묘년조에서 일본의 위세가 강력히 묘사된 것도 이러한 맥락의 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 4세기경 일본의 국력은 매우 약했지만, 약한 일본에게 속국이 공격받았다는 것은 속국을 관리하지 못한 광개토대왕의 책임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을 약소국이 아니라 백제, 신라 등을 휘어잡을 정도의 강국으로 묘사한 거죠.
이처럼 신묘년조에 대한 연구는 텍스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함에 따라 어느 정도의 방향성이 수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요.
무엇보다 광개토왕비 연구는 그간 신묘년조에 지나치게 천착한 측면이 있습니다. 1700여자 중 17자 정도에만 주목하였으니, 전체 비문의 1%를 두고 거의 한 세기를 보낸 것입니다.
광개토왕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신묘년조를 벗어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역사 잡지식 1 : 서동요와 선화공주] https://orbi.kr/00037641895
[오늘의 역사 잡지식 2 : 축성의 달인 가토 기요마사] https://orbi.kr/00037667479
[오늘의 역사 잡지식 3 : 진평왕의 원대한 꿈] https://orbi.kr/00037964036
[오늘의 역사 잡지식 4 : 신항로 개척과 임진왜란] https://orbi.kr/00038174584
[오늘의 역사 잡지식 5 : 라스카사스 - 반식민운동과 노예 장려] https://orbi.kr/00038777847
[오늘의 역사 잡지식 6 : 동방의 예루살렘, 한국의 모스크바] https://orbi.kr/00039353742
[오늘의 역사 잡지식 7 : 마라톤 전투의 뒷이야기] https://orbi.kr/00039446583
[오늘의 역사 잡지식 8 : 투트모세 4세의 스핑크스 발굴] https://orbi.kr/00039547389
[오늘의 역사 잡지식 9 : 천관우-한국사학계의 먼치킨] https://orbi.kr/00039562829
[오늘의 역사 잡지식 10 : 연천 전곡리 유적] https://orbi.kr/00039716742
[오늘의 역사 잡지식 11 : 고대 문자의 보존] https://orbi.kr/00039737161
[오늘의 역사 잡지식 12 : 쿠릴타이=만장일치?] https://orbi.kr/00039810673
[오늘의 역사 잡지식 13 : 러시아의 대머리 징크스] https://orbi.kr/00039858565
[오늘의 역사 잡지식 14 : 데카르트를 죽음으로 이끈 여왕] https://orbi.kr/00039928669
[오늘의 역사 잡지식 15 : 권력욕의 화신 위안스카이] https://orbi.kr/00040043207
[오늘의 역사 잡지식 16 : 간단한 기년법 정리] https://orbi.kr/00040188677
[오늘의 역사 잡지식 17 : 4대 문명이라는 허상?] https://orbi.kr/00040209542
[오늘의 역사 잡지식 18 : 토머스 제퍼슨의 토루 발굴] https://orbi.kr/00040310400
[오늘의 역사 잡지식 19 : 그들이 생각한 흑사병의 원인] https://orbi.kr/00040332776
[오늘의 역사 잡지식 20 : 홍무제랑 이성계 사돈 될 뻔한 썰] https://orbi.kr/00040410602
[오늘의 역사 잡지식 21 : 영정법의 실효성] https://orbi.kr/00040475139
[오늘의 역사 잡지식 22 : 상상도 못한 이유로 종결된 병자호란] https://orbi.kr/00040477593
[오늘의 역사 잡지식 23 : 상나라의 청동 기술] https://orbi.kr/00040567409
[오늘의 역사 잡지식 24 : 삼년산성의 우주방어] https://orbi.kr/00040800841
[오늘의 역사 잡지식 25 : 익산이 백제의 수도?] https://orbi.kr/00040823486
[오늘의 역사 잡지식 26 : who is 소쌍] https://orbi.kr/00040830251
[오늘의 역사 잡지식 27 : 석촌동의 지명 유래] https://orbi.kr/00040841097
[오늘의 역사 잡지식 28 : 광개토왕비(1) 재발견] https://orbi.kr/00040874707
[오늘의 역사 잡지식 29 : 광개토왕비(2) 신묘년조 발견] https://orbi.kr/00040947507
[오늘의 역사 잡지식 30 : 광개토왕비(3) 넣을까 말까 넣을까 말까 넣넣넣넣] https://orbi.kr/00040958717
[오늘의 역사 잡지식 31 : 쌍팔년도] https://orbi.kr/00040959530
[오늘의 역사 잡지식 32 : 광개토왕비(4) 여러분 이거 다 조작인 거 아시죠?] https://orbi.kr/00040970430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뭔 점검이여 ㅅㅂ ㅋㅋ
-
1. 본인피셜 내신 7등급 → 강원도 지방사립대 (강릉원주대 상지대 이런 곳...)...
-
잠이안옴…ㅠㅠ 0
한시간 자고 에어컨때매 추워서 깼는데 2시간째 못자는중… 그냥 아예 새고 저녁에 잘까요
-
언매 강의 안하시는 이유가 특별히 있을까요? 언매 강의도 찬우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
ㅈㄱㄴ 갓반고 하방은 생각보다 낮은데 (경험담) 아예 특목자사고들은 어떨지 좀 궁금함
-
쉬운문제에서 실수해서 시간은 시간대로 빨려서 다른문제도 못풀고 맞춰야 할거 틀리니까...
-
ㄹㅇ 언제든 바로 녹음할 수 있게 준비해놔야하나
-
그래서 주겼더니..피가..
-
찬란히 빛이 쏟아지는 새벽 오래 닫혀진 문은 산천을 울리며 열리었다 그립던 깃발이...
-
아니 이양반 1
롤을 껐다키라고 했는데 컴을 꺼버렸네
-
세월이 야속하구나
-
돌아와라
-
나이메타 뭐지 8
제 나이 맞추면 2000덕을
-
딱 결심했다 3
아이스크림먹고 3시반엔 자자
-
아예 못하나요? 아니면 쉬는 시간이나 남는 시간에 핸드폰 주나요? 그리고 개인...
-
새벽 단잠 속 꿈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구나
-
05하기 어렵네
-
대치가 또 파스타맛집 성지인데
-
난 처절하게 울 때가 행복하다
-
초딩 사촌동생이 쓸법한 프사라던데
-
같이 얘기해줘 제발. . . . 너무 외로워 갑자기
-
난 햄버거 먹고싶음
-
볼때마다 세월의 무상감이 이루 말할수가없다
-
난 반말하고 03분은 존댓말쓰는 기이한현상...
-
미적 기출 하려는데 다른 선생님거 들어보고 싶어서요 양승진 기출코드랑 이미지...
-
훈t보고 동류항 슈슈슉 계산법 따라하다 보니 6평쳤을 때랑 비교하면 2배는 빨라진듯
-
수능 백분위로 9
90 99 2 99 99 이런식으로 나오면 메디컬 가능한가요?? 국 수 영 화1...
-
오르비너무고요해 9
아직자긴싫은데
-
계단에 올라갈때 감정이 섞이질 않듯이.. 공부도 한 발 한 발 그냥 내딛는거임
-
공부계획 수립중 2
3일동안 할 벼락치기 과정을 생각중 14회분의 모의고사가 있는데 이걸 3일에 어떻게...
-
몰래 먹는 과자만큼 맛있는 게 또 있다냐?
-
ㄷㄷ
-
실물이 너무 예쁨. 영어로 뭐라고 쓰여져있는것도 간지나고
-
확실히 조용하네 3
작년 이맘때쯤은 활발했는데 말이지 아무튼 자러감... ㅎㅎ 그냥 요새 재밌는 게...
-
유신T 0
유신T 독서 들었었는데 비슷한 느낌으로 강의하시는 분 없을까요? 인강이든 현강이든
-
잘자요 4
나의 사랑 오르비언 여러분
-
눈팅해도 재미가옶음 좋은거겟지
-
알바노?
-
킬캠다품 0
케케 재밋네요
-
집가서 4
소주한사바리
-
하루종일 공부하고와도 잠 안올땐 안와서 너무힘듬 ㅜㅜ
-
내가 또 실패할까봐 너무 무서워서 미칠거 같은 때마다 보는데, 사실상 최초의...
-
2시에자야지 6
음
-
작년에 물1지1 선택해서 3컷 1컷 받고 전적대인 경희대로 돌아왔습니다....
-
A+ 컷 960 6
내 점수 이거 뜸
![](https://s3.orbi.kr/data/emoticons/oribi_animated/006.gif)
신기하네요...! 역사서나 비문 등의 신뢰성 문제는 저도 나름 생각해본적이 있엇어요 근데 잘 모르겟어서...대학가서 배워보고싶었어요 ㅎㅎㅎㅋㅋㅋㅋ![](https://s3.orbi.kr/data/emoticons/oribi_animated/015.gif)
역사학 쪽 교양 강의 들으시면 여기에 대해 잘 설명해 주실 거에요참고로 사료의 객관성 논쟁은 90년대에 역사학계에 크게 불어닥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에 역사학계가 크게 데였었죠
사학과가면 이런거 배우나요...어렵네요 뭔가
![](https://s3.orbi.kr/data/emoticons/rabong/011.png)
그래도 재밌지 않나욤맨날 고구려는 자국중심 천하관이라고만 외우다가 이렇게 자세히 알게되니 새롭네요ㅋㅋ 이런 논쟁들 볼때마다 타임머신타고 저 당시로 가보고 싶은..
자국 중심 천하관에 대해 첨언하자면, 고구려는 중국의 조공 질서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고구려 왕과 중국 천자를 동일한 위치로 생각했습니다.
너도 짱 나도 짱 우리 둘 다 짱 요런 마인드랄까요
오... 고구려랑 뭔가 잘 어울리는듯하네요 제기준 상남자 이미지라ㅋㅋㅋ 좀 다른얘기지만 역사잡지식 정주행해야겠어요 잘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