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에게 금지된 고급 취미생활
최근 한 수험생이 이런 질문을 해왔습니다.
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공부를 하더라도 한 가지 궁금한 내용이 생기면 그것이 해결되기 전까지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 어려워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으로 인해 그 내용을 찾아보느라 몇 시간을 쏟기도 하는데요... 혹시 이러한 문제점을 고치는 것이 좋을까요, 혹은 꼼꼼히 공부하는 제 나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유지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이런 자질이 대학원에 가기에는 좋지만, 대학에 가기에는 불리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진리탐구가 아니라 시험공부를 하는 중일 뿐입니다. 수험생은 지문에 딸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만 고민하면 충분해요. 그 너머를 고민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그냥 고급 취미생활이에요.
물론 지문에 딸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 고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시험지문은 문제 출제를 염두에 두고 쓰인 글이므로, 글에 제시된 퍼즐을 모두 짜맞춰야만 문제가 다 풀리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퍼즐을 짜맞추려면 글의 핵심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고, 빈출되는 출제패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합니다. 물론 출제패턴이라는 것은 글의 이해도를 평가하기 위해 출제자가 사용하는 습관적 기술에 붙인 별명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지문을 온전히 이해하는 연습을 충분히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올해 기조가 유지된다면, 기출100세트(100문제 아니고 100지문!)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지문에 딸린 문제들은 내가 온전히 글을 이해했는지 평가해주는 동시에 얼마나 깊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줍니다. 만약 딸린 문제가 없었다면 글을 오독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문제 덕분에 여러분은 읽기능력을 향상시킬 기회를 얻게 됩니다. 틀린 문제를 분석하다 보면, 그 끝에는 나의 문제를 발견하게 될 거고, 그러면 교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문을 충분히 이해하여 딸린 모든 문제를 정확하게 맞혔다면, 혹은 사후적으로 분석하여 정답과 오답의 근거까지 다 파악할 정도로 지문을 이해했고, 또 그 정도로 지문을 이해하기 위해 어떻게 읽어야 했는지 자세 교정까지 마쳤다면, 분석을 멈춰도 됩니다. 문제풀이와 무관하지만 단순히 궁금하다는 이유로 몇 시간씩 붙잡고 분석하는 일은 강사만이 가질 수 있는 고급 취미입니다.
제가 그 사례를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전기추2(2013~2024 수능 초고속 분석) 수강생이 다음 문장이 이해가 안 된다고 질문을 해왔어요.
1사적 연금에는 역선택 현상이 발생한다. 2안정된 노후 생활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주로 가입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피하므로, 3납입되는 보험료 총액에 비해 지급해야 할 연금 총액이 자꾸 커지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 수 있지만, 이해하려고 곰곰 고민해보면 왜 2가 원인이 되어 3과 같은 결과가 도출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든요. 문제풀이와 무관하기 때문에, 저도 질문 받기 전까지 딱히 고민해본 적이 없었어요. 근데 답변하려고 하니까 잘 모르겠더라고요.
한참 고민해봤어요. 그래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회계사인 친구, 경제학 박사과정에 있는 지인 등에게도 물어봤는데 속 시원한 설명을 못 해주더군요. 그래서 비슷한 주제(보험경제학)의 논문을 찾아서, 논문 저자 교수님께 문의를 드렸습니다. (당연히 자문료도 드립니다.) 그리고 받은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경제학자가 수능 국어 지문을 본다면?
혼자 고민해서는 답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그마나 저는 국어강사니까 고급 취미생활로 시간과 돈을 써가며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수험생이 혼자 위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세줄요약
1. 딸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만 이해하자.
2. 100지문 정도 빠삭하게 풀어보자.
3. 위 링크는 본문만큼이나 라끄리(오르비 설립자) 님 댓글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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