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허접해도꿈만은 [36208] · MS 2003 · 쪽지

2007-03-03 18: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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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은 허접해도 꿈만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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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달간의 짧은 사투, 고2 겨울방학

문과로 바꾼 후 나는 정신을 가다듬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동기부여를 받기 위해서 수능수기같은 책을 검색하여 구입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레인메이커\'라는 책과 변호사 고승덕씨의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였다.


▲이과에서 문과로 바꾼 고2 겨울방학 때 산 수기집 \'레인메이커\' 여기에는 야구선수 출신에 서 삼수를 하여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 선배와 성악을 전공하다가 공부를 하여 경희대 한의예를 들어가는 선배들이 있는 등 여러 사람의 수기가 오르비의 일부 수기와 달리 거짓없이 인증까지 포함하여 진솔하게 담겨있다.


▲레인메이커 중 한 명인 김명완 선배님. 이 분은 이은성이 지은 소설 동의보감을 읽고 허 준의 일생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한의사로 꿈을 정한 후 그 목표를 위해 매진하지만 삼수까지 실패하게 된다. 그런 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해병대를 다녀온 후 1년 반 가까이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독학을 하여서 400만점이던 시절 388점을 받고 우석대 한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김명완 선배가 그 책에 남긴 글, 지금 나의 오르비 아이디인 \'실력은 허접해도 꿈만은\'을  여기서 처음 보았다. 김명완 선배의 수기에 커다란 감동을 먹었다. 원래 아이디는 이것이   아니었는데 삼수를 시작하면서 이 책을 우연찮게 다시 읽게 되었고 너무나 가슴에 와닿아서 아이디를 이렇게 바꾸었다. 물론 감동은 잠시였고 삼수 초기에는 나태해짐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0- (자신을 바꾸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 때 깨닫게 된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 행복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 한국인들이 가장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결국은 자기 내면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력도 대단하지만 머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고승덕 변호사. 대학 재학 중에 3시를 패스해 버린 천재 중에 천재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똑같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오산이다. 개인적으로 이 분과 더불어 천재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제주도가 낳은 천재 원희룡 국회의원 (모의고사 수석, 학력고사 수석, 사시 수석 등등 수석인생이라고 불림 ㅡㅡ)이 있다. 두 분 다 머리가 좋으므로 노력한다고 해서 저렇게 될 꺼라는 착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레인메이커와 고승덕 변호사의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동기부여를 받았다. 고승덕 변호사 책을 읽고는 사실 좀 허탈했다. 천재가 이런 천재가 다 있냐나 싶었다. 나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1등만 하고 산 소위 말하는 \'원래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자극 같은 것은 받지 못하고 그냥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레인메이커는 조금 달랐다. 여기에는 물론 처음부터 잘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운명은 잡은 해병\' 김명완 선배처럼 바닥부터 기어서 노력으로 극복한 분들도 있었다. 여기에서 동기부여를 많이 받았다.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지금 오르비에서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분들 중 대부분이 동기부여를 받기 위해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수기들은 잠깐의 자극이 되어줄 뿐이지 지속적인 자극이 될 수는 없다. 진정한 동기부여는 바로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야 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하는 분은 수능이 끝나고 나서 한 번 생각해보시길,,,-0-

고2 겨울방학은 너무나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고3 으로 가는 길을 미리 좀 닦아놔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오전에 보충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풀로 자습을 했다. 나는 서서히 스타를 끊어가고 있는지라 이때부터 체력이 많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자습시간에는 졸지 않았다. 학교 열람실에서 하는 저녁 자습은 방학기간 동안은 자율이었는데 단 하루도 빠짐없이 와서 공부를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래도 버릇은 쉽게 못 고친다고 했던가,,, 주말이 되면 열람실에 있다가 PC방에 가서 메신저에 접속하여 친구들과 스타약속을 잡고 스타를 열심히 했었다. 한 번은 주말에 PC방에서 5시간 연속으로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말에 열람실에 와서 나홀로 잠을 자곤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행스럽게 \'주말로만\' 그쳤을 뿐이었다.

문과로 전향하면서 내가 선택한 사탐 4과목은 국사, 근현대사, 경제, 사회문화였다. 일단 3학년 내신을 공부해야 되기 때문에 선택과목은 거의 다 3학년 때 배우는 과목 위주로 했다. 위 4개 중에서 근현대사, 경제, 사회문화는 3학년 때 배우는 과목이었다. 나머지 1과목을 결정해야 했는데 나는 평소에 좋아하는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국사를 선택하였다. 국사와 근현대사를 같이 공부하면 시너지 효과도 있을 꺼 같은 느낌이 들었고 워낙 내가 역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국사를 선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사는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많이 선택한다고,,,ㅡㅡ;;) 학교에서 배우는 데 내가 선택하지 않은 과목은 윤리였는데 윤리는 배우기 싫었다,,, 윤리보다는 국사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택과목까지 정하고,,, 고2 겨울방학은 이때까지 보다 더욱 열심히 하였다. 수학도 다시 제대로 하기 위해서 수1 개념원리를 샀다,,, 앞 장부터 차근차근 살펴봤는데 1단원 끝낸 걸 어떤 놈이 훔쳐갔다 ㅡㅡ; 그래서 개념원리를 다시 사고 이제는 사물함을 도난방지용으로 열람실에 두고 활용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공부말고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도 바로 열람실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 국사와 근현대사는 기본서를 뭘로 해야될지 몰랐는데 그 당시 대세였고 또 신뢰도가 높았던 출판사인 디딤돌 출판사 문제집을 샀다. 그리고 경제도 디딤돌 출판사 문제집을 학교에서 한다길래 샀으며 사회문화는 문제집은 사지 않았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누드교과서를 하나씩 샀다,,,

이 글을 보시는 국사, 근현대사 선택자 분들은 누드교과서를 사지 말기 바란다,,, 국사랑 근현대사는 교과서 안에 모두 답이 있다,,, 절대 누드교과서의 화려한 표지에 현혹되어 사는 실수를 하지 말기 바란다,,, 누드교과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나오는 내용이 다 교과서에 있고 누드교과서에는 없는 것이 많이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부단히 노력하면서 고2 겨울방학을 보냈다. 이과에서 문과로 다시 갈아탄지도 벌써 2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주말에 스타를 가끔 하는 것을 빼고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3월 달이 찾아왔다,,, 나는 드디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여기는 고3 이 되었던 것이었다,,,!!

■ 인생 최초의 목표 : 고려대 법과대학

고3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3학년 2반에 배속되었고 우리 담임선생님은 아이러니하게 내가 작년에 왔다 갔다 한 2-2반 문과반 담임 선생님이셨다. 담임선생님은 3학년 첫 날에 비장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열심히 하자는 식으로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세월이 머리속으로 스쳐지나가곤 했다,,, 초등학교 때가 엊그제 같고, 중학교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대한민국의 고3 이 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아마 지금 고3을 올라가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공감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반 얘들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했다. 2학년 때 좀 논다고 했던 얘들도 이상하게 3학년 때 되니까 조용하게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선생님께서 우리 반 학생들을 한 명씩 상담을 하셨다. 상담내용은 목표대학이 어디이고 또 현재 공부상태는 어떤지 정도를 체크하는 것이었따. 내 차례가 되어서 3학년 지도실에 갔고 담임선생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기 전에 교실에서 미리 받은 종이에다가 나의 목표대학과 과를 1지망 2지망 3지망 순으로 적어야 했다. 나는 고2 때까지 제대로 꿈꿔 본 목표대학과 목표 과가 없었다. 하지만 문과로 바꾸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었다,,, 내가 문과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나의 성격이나 관심 분야인 사회를 생각했을 때 법대를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법을 공부해서 올바르게 이용하여 나 자신도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을뿐더러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영이나 경제나 행정도 생각해봤지만 일단 경영이나 경제는 나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과 절대 맞지 않는 거 같았다.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의사결정을 자주자주 해야 되는 그런 분야에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래야 할까 저래야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끝난다면 ㅡㅡ;

행정은 법과 약간 비슷한 선상에 있어서 생각해봤지만 우선순위를 법대에 두기로 했다. 부모님도 법대에 가면 법을 배우면 사회에 나가서 어느 곳이라도 나갈 수 있는 진로의 폭이 넓은 학과라고 조언을 해 주셔서 그렇게  과를 결정하였다. 과도 결정하였으니 법대에서 가장 높은 법대를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법대는 서울대 법대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 법대를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대 법대 출신 국회의원들이 너무나 얍삽한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어이가 없어서 서울대 법대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공부는 잘 하되 약은 사람들만 모인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서울대 법대 출신이 정치권에 많기 때문에 또 그 중에서 약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런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런데 그게 또 서울대 법대니까 또 눈에 잘 보이는 것이었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니 말이다,,, 어쨌든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있기 마련인데 이 때 나의 사고는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서울대 법대를 제외하고 나니까 다음 법대가 바로 고려대 법대였다,,, 겨울방학 때 인터넷으로 고려대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고려대 캠퍼스도 보고 법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했었다,,, 와,,, 정말 너무 멋있었다,,, 캠퍼스가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왜 진작에 이런 곳을 알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막 몰려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흐를대로 흘렀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50여일 밖에 남지 않았었다,,,

고려대 법대,,, 너무 가고 싶었다,,, 아니 법대를 제쳐두고라도 \'고려대\'라는 학교를 너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런 캠퍼스에서 대학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고려대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끈끈함\', 그리고 \'민족고대\'라는 타이틀, 그런 이미지들이 내게는 너무 크게 와닿았다. 빨간 고대잠바를 입고 고연전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도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말 내가 저 곳을 밟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 다음으로 연세대와 성균관대, 한양대, 경희대, 중앙대 등을 알아봤지만 내 눈에는 고려대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려대라는 학교에 본능적으로 끌렸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미 이렇게 지망대학과 과를 정했기 때문에 주저없이 선생님에게 내가 적은 종이를 보여 드릴 수 있었다.

1지망 : 고려대 법대 2지망 : 성균관대 법대 3지망 : 경희대 법대를 적었었다. 종이를 보시자마자 선생님은 일단 모든 과가 법대라는 것을 보시고는 일단 과는 확실하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내 성적을 컴퓨터로 검색하기 시작하셨다,,, 내 성적을 보시고 다시 종이를 보신 선생님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성적으로 많이 어려운 곳인 거 알고 있지? 고대 법대라,,, 정말 높은 곳이다.\"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그런 말씀과 표정이 이해가 갔다. 왜냐하면 나는 이과에서 문과로 갓 넘어온 허접이었으니까,,, 나는 대답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적상담을 하고 나서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나는 이때까지 살면서 무엇인가 간절하게 원해 본 것이 없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아무 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냥 생각도 없이 게임만 하고 학교에서 자고,,, 막장스럽게 살았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나의 허접스러운 인생에 있어서 고려대는 너무나 가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되었다,,, 너무 가고 싶었다,,, 레인메이커 수기에서 읽은 김명완 선배의 \'실력은 허접해도 꿈만은\' 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꿈을 높게 잡고 난 뒤로 열심히 공부를 시작하였다.


■ 게임중독 탈출과 희망찬 출발!

고3이 되고 나서 정말 희한한 일이 하나 더 발생하였다,,, 그렇게 스타리그를 즐겨보고 스타를 열심히 했던 내가 스타를 접게 되었던 것이었다,,, 고2 겨울방학 때까지는 평일에는 스타를 안 하고 주말에는 그래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주말에도 게임방에 가지를 않았다, 집에서 스타를 지운 것은 고2 10월 달에 290점을 받은 날이었다. 새벽마다 스타와 관련된 경기를 보고 늦게 자서 학교에서 가서 매일 졸았지만 이제는 아주 가끔가다가 보고 내 의지로 자기 전에는 스타와 관련된 경기를 보지 않기로 노력했다.

스타경기를 보는 것은 1학기 때까지는 완벽하게 끊지는 못했지만 2학기 때 완벽하게 끊었고 스타를 하는 것은 고3이 되자마자 놀랍게도 끊었다. 아니 \'끊어졌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PC방으로 발이 가지도 않고 집에 다시 스타를 깔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이 때까지 내가 해온 게임이 다 허망할 만큼 그렇게 쉽게 끊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고3 이라는 의무감이 대단히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긴,,, 그 의무감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고 또 공부라는 것의 재미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처음으로 전국연합 모의고사를 치게 되었다.


▲ 고3이 되어서 처음 치룬 3월 전국연합평가다. 언어 70점, 수학 69점, 외국어 89점, 국사 44점, 근현대사 50점, 경제 43점, 사회문화 37점으로 총점 402점을 받았다. 이과에서는 300점 넘기기도 힘들었던 내가 400점을 넘겼던 것이었다. 언어는 역시 변동이 없었고 외국어는 조금 올랐으며 (이 때 외국어가 쉽게 나와서 89점이 백분위 91%였다.) 수학은 수리 나형 범위가 워낙 적었고 잘 찍어서 나 같은 수학허접이 1등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원점수로 치면 GG ㅡㅡ; 그리고 후에 나오지만 수학은 범위가 커지면서 안드로메다를 향해 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탐은 정말 선전했다, 그건 고2 겨울방학 때 사탐을 열심히 공부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근현대사 50점을 받고 너무 기뻤다. (물론 우리 고3 때 사탐은 2005년도와 2006년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쉽게 출제 되었다. 그래서 05 수능 때도 쉽게 나왔고 일부 과목에서 2등급이 증발하는 사태가 나게 되었다. 이에 평가원에서는 탐구에 변별력을 주기 위해서 이 다음해부터 탐구를 어렵게 내게 된다.)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하면 될 수 있을 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한 번의 시험으로 나 자신을 평가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앞으로 좀더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4월 전국연합,,, 12점이 올라서 414점을 받게 된다.


▲이 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할 수 없이 기뻤다, 진짜 하면 된다는 걸 다시 체험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외국어가 82점이었고 언어가 77점으로 고려대 법대를 갈려면 택도 없는 점수라고 생각했다, 사탐을 제일 잘 받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수학도 뽀록이 나서 무려 85점을 받았다,,, 그러나 4점짜리 문제 3개를 찍어서 맞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나는 성적이 계속 오를 줄 알았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바로 현재의 시험범위가 수학과 사탐이 전범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과에서 문과로 넘어와서 점수가 팍 뛰니까 너무 좋았다. 그런데 실상 어디에서 올랐나 보면 일단 과탐이 아닌 사탐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그리고 수학 순으로 올랐다, 언어랑 외국어는 이과에 있었을 때보다 조금 올랐다. 언어는 항상 60~70점대고, 외국어는 항상 70점~80점대,,, 더욱더 열심히 하면 해낼 수 있을 꺼라고 믿고 공부를 해나갔다,,, 진짜 다른 친구들도 다 열심히 하는 고3 교실분위기에 나도 동화되어서 정말 열심히 한 거 같다,,,


스타를 끊고 나니 체력도 너무 좋아졌다. 물론 비염은 고쳐지지 않아서 수업시간이면 항상 코가래를 풀러 교실 뒤로 가는 게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앉아있는 시간은 집중해서 열심히 했다. 내가 옛날부터 잠충으로 유명했는데 안자는 걸 보고 예언가(?)인 영어 선생님께서는 요새 왜 안자냐고 묻기까지 하셨다. 그래서 나는 게임을 끊으니까 체력이 좋아졌다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고3이 되어서 나의 공부는 오로지 풀 독학이었다. 수업시간에는 필요한 수업은 열심히 듣고 필요 없는 수업시간에는 내 스스로 공부를 하였다. 근현대사랑 경제, 사회문화 수업은 정말 큰 도움이 되어서 3학년 때 문과로 전과한 나의 사탐공부에 뼈대를 잡아 주었다. 학교 수업이 필요 없다고 사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학교 수업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처럼 사탐의 경우에는 학원이나 학교 수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뼈대를 잡는 것이 전부다. 살은 자기가 붙여야 한다. 그리고 수능공부라는 것은 솔직히 누가 안 가르쳐줘도 일단 구성만 안다면 혼자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자세히 계속 언급할 것이다.) 그 과정과 결과는 자신의 머리와 노력에 의해서 천차만별인 것이고,,,

5월이 되어서 14일날 악명높기로 유명한 월례고사라는 것을 쳤다. 월례고사가 뭔지 몰랐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재수학원에서 치는 모의고사라고 하셨다. 교육청이나 다른 사설들과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선생님은 \"많이 어렵다.\"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리고 14일이 되어서 종로 월례고사를 치게 되었다,,,


▲ 종로월례고사에서 안드로메다로 날아 가버렸다. 백분위 점수를 보고 나서 정신이 멍했다. 언어야 뭐 이래나 저래나 항상 저 점수였고 특히 수학에서 너무나 할 말이 없었다,,, 항상 나는 수학 풀 때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찍고 또 좀 맞기도 해서 이번에도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푼 것보다 찍은 게 더 많았다. 게다가 찍은 걸 좀 많아서 46점을 받았으니,,,,ㅡㅡ;; GG,,, 그리고 외국어,,, 정말 이렇게 시간이 부족해서 문제를 날려 버린 적은 처음이었다. 뒤에 도대체 몇 지문을 날렸는지 모르겠다,,, 막 찍어서 나온 점수가 55점,,, 그리고 사탐도 망했는데 황당하게 사회문화를 50점을 받고 백분위 100을 받았다. 삼수를 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저렇게 뽀록으로 한 번씩 터질 때가 있긴 있다,,,ㅋ

종로 월례고사 얻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점 315점,,, 고려대 법대를 가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점수였다,,, 특히나 언수외 백분위 점수는 쇼크 그 자체였다. 고려대 법대를 가려면 언수외 백분위가 99 99 99가 나와야 가능한데,,,ㅠㅠ 나의 실력이 부족한 것임을 깨닫고 계속 열심히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6월이 찾아왔고,,, 나는 평가원에서 예비 수능으로 치게 되는 6월 모의평가를 치루게 된다.


▲6월 2일 모의평가 성적표,,, 사회문화와 국사가 망하고 근현대사와 경제는 어느 정도 선방했다. 그러나 수학이 여전히 점수가 오르지 않았고 특히 충격인 것은 외국어 점수 74점,,, 그리고 언어는 뽀록이 나서 힘겹게 81점을 받았다,,, 제 2외국어 일본어는 공부를 하지 않아서 다 찍어서 6등급을 맞았다.

6월 2일 모의고사 결과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열심히 했는데 크게 변동이 없었다, 오히려 4월에 비하면 20점 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탐과 수학 범위가 넓어지면서 찾아오는 재앙의 시작임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너무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겨내고 싶었다. 아직 나에게는 5달 남짓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고려대 법대를 가는 기적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 메가스터디 K교주님과의 만남

6월 24일날 종로 모의고사를 치룬 나는 더욱더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된다,,, 6월 모의평가를 치룬 뒤 열심히 했는데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그리고 불규칙했던 언어 성적은 급기야 59점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수학 범위가 늘어나고 사설 특유의 머리를 심하게 쓰는 문제들에 휩쓸려서 수학에서 56점을 받고 말았다,,, 거기다가 더 심각한 건 외국어,,, 80점대를 유지해도 모자를 판에,,,, 77점을 받았다,,, 언어 5등급 수학 3등급 외국어 3등급,,,ㅠㅠ


▲좌절의 시발점이 된 6월 24일 종로 모의고사, 사탐은 원점수는 좋은데 백분위가 정말 상큼하다, 언수외는 이거 뭐,,, GG

일단 나는 딱 무슨 과목 하나를 잘 하는 것이 없었다. \'전략과목\'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제일 잘 하는 것이 외국어 영역이었는데 점수가 오르기는커녕 점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틀어주는 EBS 강의도 열심히 듣고 나 스스로도 열심히 문제를 풀고 했는데 성적이 오르질 않았다,,, 뭔가 불안했다,,, 누군가에 의존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친한 친구를 통해서 메가스터디 외국어 영역 강사 K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친구를 통해서 듣게 된 K선생님의 강의력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았다. 친구도 나랑 비슷한 외국어 성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외국어가 뭔가 깨우쳐지는 느낌을 들었다고 했다. 너무나 절박하고 위급해서 그 친구에게 그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쓴웃음만 나온다,,, 아마 과외나 학원이나 인강을 듣는 모든 학생들의 심리는 바로 나 스스로는 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시작할 터인데,,, 나도 이 당시에는 그런 심리에서 인강을 듣게 되었다,,,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K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된 나는 어떻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와!! 이게 바로 외국어였구나,,, 나는 이때까지 도대체 뭘 했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었다,,, 주어진 지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1~2개의 핵심문장을 통해서 알아내는 그 스킬,,, 그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았다. 그 선생님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닿았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올바르게 한다면 외국어 영역 1등급이 가능하다는 그 소리를 철썩 같이 믿었다.

그래서 정말 K선생님이 강의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습, 복습을 정말 철저하게 하였다. 그 때까지 보던 누드교과서 외국어영역 기본편은 접고 EBS와 K강사님 교재로 공부를 해나갔다,,, 강의를 보면 볼수록,,, 정말 몰입하게 되었다,,, 정말 외국어 영역 공부를 제대로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까지 내가 했던 외국어 공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K강사님에게 중독이 되었다,,, 그리하여 K강사님은 나에게 K교주님이 되었고 이 인연은 05 수능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뒤에서 계속 얘기 있음)

■ 한치 앞도 알 수 없다

7월 달이 되어서 대성모의고사를 치루게 된다, 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K교주님의 강의를 들은 자신감과 그리고 다른 과목을 열심히 공부한 노력이 그대로 시험에서 비춰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7월 대성 모의고사 결과,,, 지금 보니까 등급이 너무나 아름답다,,, 점수도 아름답고,,,

결과는 또 한 번의 안드로메다행이었다,,, 외국어가 70점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전국연합은 그래도 80점은 넘겼는데 사설은 도대체 70점대를 벗어나지를 못 했다,,, 언어영역은 절대 점수가 오르지 않았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언어영역, 그리고 고시의 1차 과목은 PSAT의 언어논리, 상황판단, 자료해석영역의 경우에는 공부를 해도 안되는 사람은 안되고, 공부를 안되도 되는 사람은 되는 희한한 과목이다, 왜냐하면 언어영역은 공부를 한다는 개념자체가 통하지 않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비문학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로 다져져온 빠르게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문학에는 또 느끼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수학은 범위가 늘어나면서 감당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다,,, 개념원리를 보면서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본문제와 심화문제를 열심히 풀고 학교에서 나가는 메가스터디 N제도 열심히 풀고 했는데 많이 힘겨웠다,,, 그리고 사탐과목 중에서 경제가 망했다,,, 나는 몰랐는데 사탐 중에서 나랑 경제가 제일 안 맞는다는 것을 이때부터 알게 된다,,, 공부를 해도 안 되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삼수까지 하면서 깨닫게 해 준 것이 경제였다. (07 수능에서는 4가지 과목 중에서 경제를 제일 잘 치는 상황이 발생한다,,,ㅡㅡ; 그래서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도저히 이 점수로 고려대를 갈 수가 없었다,,, 고려대는커녕 60만 수험생 중에서 90%가 목표로 하고 있는 인서울 대학교도 갈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더 떨어지지??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래서 보니까 일단 수학은 지수와 로그, 상용로그 말고 뒷부분, 그러니까 순열과 조합, 그리고 행렬에서 ㄱ,ㄴ,ㄷ문제, 극한에서 ㄱ,ㄴ,ㄷ 그리고 수학적 머리를 묻는 문제 등 3,4점짜리 고난도 사고력 문제에서 전멸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그런 문제들은 너무 힘겨웠다,,, 게다가 수학 10-가,나가 연계되어서 나올 경우에 그 문제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고1 때 공부를 하지 않아서 수학 점수가 34점까지 받아본 사람이다,,, 10-가, 나를 제대로 공부했을리 만무하다,,, (순열과 조합 부분은 서울대를 가서 다른 동기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나의 생각대로 그 사람의 순수한 수학적 머리를 테스트 하는 과목이라고 하였다. 수학적 머리가 떨어진다면 나처럼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행렬과 극한은 일단 외우는 것을 전제로 풀어 나가야 되는 문제라고 서울대 동기들에게 증언(?)을 들었으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다. 물론 수학적 머리가 좋으면 외워서 푸는 문제 이외의 문제도 술술 잘 풀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10-가,나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다른 과목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수1만 열심히 하면 점수가 어느 정도 나오겠지 생각하고 수1만 팠다,,,외국어는 황당했다,,, 분명히 K교주님 강의를 정말 열심히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했는데 성적이 더 떨어지다니,,, 아직 덜 여물어서 그렇다고 판단하고 더 열심히 하기로 했다,,,


■ 마지막 기회, 고3 여름방학

7월 대성모의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고3 여름방학은 마지막 역전의 찬스이고 여기서 승부를 보지 못한다면 2학기에 가서 뒤집기는 무척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반 얘들을 비롯해서 모든 3학년들이 풀어진 마음을 다시 다 잡고 마지막 역전의 찬스인 고3 여름방학에 임하게 됐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 고3 여름방학도 굉장히 그 의미가 컸다, 반드시 이번에 공부를 통해서 2학기 첫 모의고사인 9월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그 이후의 남은 2달 동안 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를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약 1달 반의 이 소중한 시간들을 알차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때 우리 학년에 인터넷 강의 붐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기숙사 특반 얘들은 인강을 듣지 않는데 나같이 성적이 낮은 얘들이 언어는 누구요, 수학은 누구요, 외국어는 K강사요, 사탐은 누구요 이런 식으로 유명강사를 알아가지고 단체로 인강을 듣는 것이었다. 기숙사 특반 얘들의 느긋함에 비해서 나처럼 성적이 낮은 얘들이 얼마나 조급해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대세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말 나 스스로 할 수 있을 꺼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유명강사의 힘에 의존하면 점수가 오를꺼라 생각하고 인강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내가 오르비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각 영역별로 강사를 하나씩 정하였다. 언어는 L선생, 수학은 B선생, 외국어는 계속 듣고 있었던 K강사, 사탐은 S사탐이라고 불리던 S선생까지,,, 이렇게 모든 과목에 선생님을 한 명씩 두고 각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방학 때는 오후자습까지는 의무이고 저녁자습은 자율이었는데 나는 급식실에서 저녁을 먹고 빨리 와서 비어있는 교실을 차지하고 인강을 매일 2개 정도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인강을 많이 듣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언어의 경우 기본반과 문제 풀이, 그리고 수학은 수능기출분석과 문제풀이, 외국어는 K강사님 커리큘럼을 계속 따라갔고 사탐은 S선생님의 기본반 강의만 들었다.

들을 때마다 정말 내가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을 꺼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나 S선생님의 강의는 K선생님 못지않게 재미있었는데 인강임에도 불구하고 앞에 앉은 학생들에게 욕을 하고 약간 상스러운 소리를 하는 장면이 많았다. 그리고 강의 도중에 수험생들이 가진 머리의 좋고 나쁨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하셔서 그 부분에 대해서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 얘기들은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고 강의드는 것을 더욱더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들으면서 뭔가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과목이 20점씩 다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쓴 웃음만 나온다. 수능시험장에서 가서 수능문제를 요리하는 것이 누구인가?? 바로 시험을 치는 자기 자신이다. 선생님이랑 같이 가서 요리를 하는 것이 하는 것인가??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강을 볼 때면 선생님들은 정말 잘 푸시고 잘 설명하신다. 그리고 마치 나도 저렇게 풀꺼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강이나 학원은 일방통행이라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한 쪽에서 한 쪽으로 전달이 될 뿐 반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맹점이다. 강사가 맛있게 요리를 해준 후에 \"자 맛있게 요리했단다, 한 번 먹어봐.\"라고 우리에게 말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요리를 맛 본 후 \"와~ 정말 맛있어요. 저도 선생님처럼 요리 할 수 있을꺼 같아요,\"라고 말을 한다. 그게 다다.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며 \'요리를 할 수 있을 꺼 같은 느낌\'만 받지 실제로 선생님처럼 요리를 할 수가 없다. 그저 선생님의 요리를 받아들이고 소화를 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성적이 올라갈 수가 없다.

미스터 초밥왕에 나오는 주인공 쇼타를 알고 있는가? 쇼타는 최고의 재료 (수능으로 치면 좋은 교재)를 얻기 위해서 직접 바다로 나서서 참치를 잡으면서 직접 맛을 보고 최고의 특참치를 구한다. 그리고 그 참치를 잘라서 밥에 올리고 하나의 완성된 초밥을 만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다. 참치와 밥의 비율이 중요한데 참치가 비율이 더 크면 초밥을 먹었을 시에 참치 맛이 강하며 밥의 비율이 더 크면 밥맛이 더 강해서 초밥의 맛을 헤친다. 그렇게 해서 쇼타는 황금비율로 두 개의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한 번에 적당량의 밥을 쥐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스스로 하였고 결국 황금비율을 맞추게 된다.

이게 누가 가르쳐준다고 될 일인가? 자기가 참치를 잡아서 맛을 보고 자기가 직접 초밥을 쥐어봐야 되는 것 아닌가? 사교육 모두를 비판하지는 않겠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최대한을 노력하여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사교육 중에서 과외의 경우에는 학원이나 인강과 달리 쌍방향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 그것이 쌍방향 의사소통 과외라면,,, 나 역시 앞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가서도 과외를 할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우리 지역에서 과외를 했을 때 과외학생들에게 이 전에 과외를 받을 때는 선생님들이 어떻게 가르치냐고 물었더니 그냥 선생님 자신이 공부를 하는 식으로 했다고 하였다. 심지어 학생의 성적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도 안 하고 하는 과외선생님도 있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런 일방통행 과외는 학원이나 인강처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과외를 할 때는 내가 바닥부터 기어온 경험과 공부의 경험을 살려서 정말 과외로 충족시켜야만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서 상대 과외학생에게 묻는다. 정답의 근거를 어디서 찾았으며 왜 그것을 정답으로 했는지 등을 묻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토론을 한다. 그리고 일부러 답인 듯 아닌 듯 혼란을 주어서 본인 자신이 정확하게 소신을 갖고 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게 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으면 가격이 적당하다면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계속하지 말고 1~2달 정도만 하고 남은 길은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성적이 오른다. 시험장에서 가서 문제를 푸는 사람은 선생이 아니고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필요조건이며 이 사실을 나는 직접 삼수를 거쳐 확인하였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레인메이커 수기에 나오는 운명을 잡은 김명완 선배님도 순수한 독학파로서 이를 입증해주셨다.)

쌍방향 과외와 달리 일방통행 과외와 학원과 인강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일방통행으로는 점수를 올리기 힘들다. 만약 일방통행 과외를 하고 학원을 다니고 인강을 들어서 성적이 올랐다고 하면 그건 \'일방통행 과외를 하고 학원을 다니고 인강을 들어서 성적이 오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를 하여 성적이 올랐는데 마침 그 시기에 일방통행 과외를 하고 학원을 다니고 인강을 들어서 그것 때문에 성적이 올랐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우리나라 사교육 광풍에 얘기해보고 넘어가자. 일단 우리나라가 공교육을 불신하고 사교육을 맹신하게 된 것은 1차적으로 공교육이 형편없는 것도 큰 문제지만 공교육을 처음부터 불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 원인은 내가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전북대 신방과 강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걸 요약한다면 \'한국의 역사는 항상 공공영역이 민중을 배신하는 역사였고 그로 인한 역사 때문에 한국인의 몸에는 공공영역을 불신하게 되는 민족적 유전자가 자기 잡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공공영역이 민중을 배신하는 경우는 우리 역사를 찾아보면 너무나 흔한데 예를 들면 6.25 때 서울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저 혼자 살려고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죄없는 민중 1천여명을 희생시키면서 한강 이남으로 도망간 이승만 정부, 뻘짓하다가 임진왜란을 초래하여 제 살길 찾아 나선 선조와 그 신하들이 백성들을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서 북쪽으로 몰래 도망친 것 등 많이 존재한다. 얼마나 백성들이 원망이 컸으면 한양에 있는 궁궐에 불을 질렀겠는가? 공공영역에 대한 배신감들로 인해 키워진 적대감이 우리 몸속에 \'민족적 유전자\'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남의 눈치를 너무 잘 보는 것\'이 사교육 광풍의 또 다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인데 \'한국인 코드\'를 읽어보니 이것은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좁은 땅에 옹기종기 모여 살다보니까 생긴 민족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항상 대세를 따른다. 한 겨울에 추워도 내복을 입지 않는다. 내복을 입으면 국가적으로 난방비가 절약되어 무려 1조 3천억원이 절약되지만 단지 남들에게 \'쪽팔릴까봐\' 내복을 잘 입지 않는다. (학창시절 겨울에 우리 반에서 나를 포함 3명만 내복을 입었다. 날씨가 매우 추운데 왜 내복을 안 입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면 하나같이 \'쪽팔려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수원시청 공무원 2300여명이 초과근무수당을 허위로 조작하여서 5년간 국고 333억이 증발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5년 동안 단 한명의 공무원도 내부고발을 하지 않았다. 고발하려는 사람도 눈치 보느라 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도 마찬가지. 남의 눈치 보느라 정신없는 게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사교육도 어느 정도여야 경제가 돌아가고 또 괜찮을텐데 정말 광적이니까 문제가 아닌가?사교육을 하면 성적이 다 오르는가? 절대 아니다. 수험생 중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과외를 받고 학원을 다니며 인강을 듣겠는가? 그런데 그들이 다 공부를 잘 하는가? 그렇지 않다. 잘하는 사람은 그 중에서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것도 이미 예전부터 공부습관이 잡혀있어서 잘하는 \'원래 잘하는 학생\'이 대다수이다.

강남대성학원을 다녀서 명문대를 간 것이 아니고 이미 명문대를 갈 실력을 가지고 강남대성학원에 들어가서 성공하는 것, 서울대 법대를 들어가서 사법고시를 빨리 패스하는 게 아니라 원래 사법고시를 빨리 패스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머리와 능력을 가진 얘들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다. 못 하는 학생은 계속 못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공부습관은 사교육에 의해서 바뀔 수 없고 내면의 성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교육 문제는 제도적차원에서 법으로 사교육을 금지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므로 의식적인 차원에서 사교육에 돈을 바치시는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의식구조 개선이 맡길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사람들의 민족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요즘 신문을 보면 계속 독학해서 성공한 학생들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당연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서울대 논술과 면접을 보고 나서 용산 CGV에 갔을때 점심먹으면서 신문에서 본 6남매를 성공적으로 키운 어머니 기사가 기억에 난다.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7&DataID=200701051516000074 (자꾸 이런 것을 가지고 극소수의 사례를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 위의 기사에 있는 것처럼 독서는 모든 공부의 시작이자 진리다,,, 어렸을 때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다,,, 그리고 이 기사를 통해서 집안이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현명한 사고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자식들이 당연히 잘 될 수밖에 없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시 고3 여름방학 얘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그렇게 모든 인강으로 부스터를 장착한 나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들었다 ㅋㅋ 고려대 법대도 꿈이 아닐 것만 같았다,,, 정말 여름방학 때는 죽자사자 공부를 했다, 진득하게 공부를 하고 밤 12시에 학교를 나오는 순간 마시는 밤공기는 정말 상쾌했다,,, 나는 항상 밤 12시에 열람실의 불을 끄고 가는 것을 습관화 했다,,,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았고 정말 열심히 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열람실에 있을 때 집중을 하지 않아서 모기들이 내 발을 건들이면 모기에 집중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3학년 여름방학 때는 모기들이 양말을 신지 않은 채 슬리퍼를 신은 나의 발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내 발이 퉁퉁 부어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정말 열심히 했다,,, 아니 신경이 쓰이는 것을 못 느꼈다. 집에 와서 발을 씻으면서 모기들이 나를 얼마나 공격했는지 알곤 했다,, 그만큼 정말 집중에 집중을 했다,,, 인강을 듣고 내려와서 집에 가기 전까지 독학하기,,, 이게 나의 7월과 8월, 2달 간의 나의 일상이었다.


▲우리 학교 지하 열람실, 시설도 좋고 공부도 너무 잘 되는 공간이다. 나는 이 곳을 매일매일 나오곤 했다. 주말에 얘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 날이 있어도 나는 항상 빠짐없이 나왔다,,, 그리고 매일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불을 끄고 수위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학교를 나섰다. 공부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바로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열람실에 애착이 생긴 나머지 반수와 삼수도 이곳에서 하게 된다,,,이곳에서 땀 흘리며 공부한 그 시간들을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 수능을 두 달 앞둔 9월,,, 절망적인 나날들,,,

드디어 대망의 9월이 되었고 나는 2번째 모의평가를 치루게 된다. 선생님은 이번 시험 점수가 그대로 수능점수로 연결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 동안 정말 열심히 했기에모의평가를 기대했다. 인강도 예습, 복습, 그리고 집중해서 정말 열심히 들었고 인강 듣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열심히 독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독학할 때는 인강을 예습, 복습하느라 시간이 좀 치우져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유명강사들과 함께 한 나는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는 느낌을 갖고 시험을 치뤘다. 그 결과는,,,


▲시험을 치루고 나서 그저 멍했다,,,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수학 49점은 나에게 너무나 큰 데미지를 주었다,,, 고려대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상태였고 그것도 모자라 허접대를 갈 성적이 나왔다,,, 아름다운 언수외와 사탐 백분위는 나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나는 인강을 탈피하고 공부 방법에 변화를 꾀하게 된다.

시험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그냥 울고 싶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이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럴수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같은 반에서는 매일 자기만 하고 판타지 소설을 속독하는 친구가 1등을 했다. 그 친구가 머리가 좋다고 걸 계속 인정하고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았지만 이때는 그렇게 그 친구가 미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머리가 좋으면 놀아도 저렇게 공부를 잘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가 머리가 좋다는 생각은 나 말고도 이미 여러 친구들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늘 다른 친구들로 보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2 때까지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지 않은가,,,! 아직 공부량이 많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아직 나에게는 2달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내 남은 투혼을 모두 바쳐 공부를 하면 하늘이 보답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게임은 끝날 때까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끝까지 열심히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9월 모의평가를 망치고 나서 공부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일단 듣고 있던 인강 중에서 K교주님의 외국어 영역 강의를 빼고 듣고 있었던 수학과 언어 강의는 그만 듣기로 했다, 사탐 강의는 이미 다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은 내가 내 머리로 문제를 분석하여 풀지 않고 선생님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그러니까 수동적인 학습태도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지만 이미 강의를 들을 때 강사가 이미 그 문제를 맛있게 요리를 해서 나에게 떠먹여 줬기 때문에 나의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강의는 끊었지만 K교주님 강의는 끊을 수 없었다. 9월 모의평가 외국어를 80점인가 79점인가 78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물론 성적은 오르지 않았지만 K교주님 말씀대로 자기를 믿고 끝까지 따라간다면 외국어 영역 1등급을 쟁취할 수 있을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K교주님의 신도였기도 했었고,,,ㅋㅋㅋ ㅡㅡ; 그 환상적인 말빨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들어보신 분은 아실 것이니,,,-0-)

언어영역 공부 방법도 수정하기로 했다, 1반과 2반의 친구들을 보니까 언어공부를 잘 하는 얘들이 판타지든지 무협이든지 비문학이든지 문학이든지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친구들이었다. 문제를 꼼꼼하게 풀고 인강을 성실하게 들었음에도 오르지 않는 점수를 위해서,,, 나는 그 친구들을 보고 그들이 하는 독서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고 독서 작전으로 나간다. 그래서 집에서 받고 있던 신문을 하루에 1시간 정독, 그리고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사주셨으나 10년 가까이 집에서 보지도 않고 썩히던 계몽사 문학전집을 하루에 1시간씩 읽기로 하였다. (삼수를 한 지금도 이때의 결심을 생각해보면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독서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언어영역 점수를 올릴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어영역 ㅚ수 친구들에게 물어봐서 얻은 대답도 바로 \'독서\'였다. 그냥 책 읽으란다 ㅡ.ㅡ;)

수학은 인강을 끊고 나 스스로 하기로 하였다. 9월 모의평가에서 받은 49점,,, 생각해보니까 B선생님이 잘 풀고 잘 설명하였으나 그건 B선생님의 머리로 잘 풀고 잘 설명한 것이지 내 머리로 잘 풀고 잘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수학적 머리가 떨어지는 마당에 남의 머리에 의존해서 수학을 하려고 하였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판단하고 남은 2달은 내 스스로의 눈과 머리와 손으로 수학을 풀기로 결심했다. (이 역시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수학적 머리가 좋은 사람은 하나를 알면 열을 알지만 나처럼 수학적 머리가 나쁜 사람은 열을 알기 위해서 열을 죽도록 내 스스로의 머리로 파야했기 때문이다.)

사탐은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문제를 학교 선생님과 같이 풀어가면서 열심히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행인 것이 우리 05수능 때에는 사탐이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 교과서가 없어도 국사랑 근현대사는 어느 정도 점수가 나올 수 있었고 경제랑 사회문화도 분석문제가 적고 그냥 원론적인 문제가 참 많았다. (만약 이 때 사탐이 어렵게 나왔으면 국사와 근현대사에서 교과서를 등한시한 나의 공부 방법으로는 완전 피똥을 쌌을 것이다,,,ㅡㅡ)

그렇게 남은 2달을 정리해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본 대성 모의고사에서,,, 나는 더 이상은 헤어나올 수 없는 좌절을 또 한 번 맛보게 된다,,,


▲수능을 50여일 앞두고 치룬 2004년 9월 23일 대성 모의고사, 아름다운 언수외 등급과 사탐등급들,,, 이 시험을 치고 나서 정신이 멍했다.

9월 대성에서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꺼 같은 좌절을 또 맛보게 된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도대체 성적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7월 달에 성적이 369점이었다,,, 너무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나서 본 9월 달의 성적이 365점이니,,, 아니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진짜 너무나 괴로웠다,,, 해도 정말 안되는 건가,,, 정말 그런 것인가,,, 수능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50여일,,, 선생님께서 9월 모의평가를 앞두고 말씀하신 \"여름방학 끝나고 친 시험이 바로 수능성적이다.\" 문구가 머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고2 때까지 공부를 하지 않다고 고3 때 버닝을 한 친구들도 오르지 않는 성적에 커다란 좌절을 하고 있었다,,,

문과와 이과얘들의 성적을 살펴보니까 2학년 때까지 잘했던 소위 말하는 \'원래 잘하는 친구\'들을 여전히 잘 하였다, 이미 물이 오를대로 올라서 계속 470점대를 유지하는 친구들도 굉장히 많았다. (이 친구들은 그 해 수능에서 망했지만 재수를 하여 원래 점수를 되찾고 의치한약, 그리고 명문대를 들어갔다.) 하지만 3학년 때 와서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 중에서 점수가 급격하게 상승한 친구는 단 1명도 없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또 당연한 진리였다. 이미 공부를 오랫동안 제대로 해 왔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은 친구들이 시험을 잘 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좌절감이 너무 컸지만 아직 내가 바꾼 공부 방법으로 공부를 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믿고 싶었다,,, 이대로 저 점수를 받아들이고 땅바닥을 기고 싶지 않았다,,, 남은 기간은 50여일,,, 나는 어머니가 이 시기에 말씀해 주셨던 \'진인사대천명\'이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고 묵묵하게 공부를 해 나가기 시작한다.

■ 수능을 앞두고 일어난 뽀록

암울했던 9월 달이 지나고 어느 덧 10월 달이 왔다,,, 창문 밖으로 교정을 바라보면 앙상한 나뭇가지뿐이었고 날씨는 쌀쌀하기만 했다. 내 마음도 날씨를 따라서 쌀쌀하기만 했다. 10월 달에는 교육청 모의고사를 치루었다. 지금 찾아보니까 성적표가 없고 일기에도 적혀 있지 않아서 그 때의 성적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기를 확인하니까 그 당시 연거푸 시험에서 좌절하면서 쓰는 것을 중단한 거 같다.) 평가원이랑 수능은 다 기억이 나는데 자잔한 모의고사들은 성적표가 없으면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으니,,, 어쨌든 10월 한 달은 모든 것을 바치는 심정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11월 2일에 있을 종로 모의고사를 위해서 열심히 달렸다,,, 학교에서도 얘들에게 무한으로 자습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순수하게 내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흘러서 대망의 11월 달이 찾아왔다. 11월달,,, 수능시험이 이제 2주 정도 남은 이 시간,,, 고2 때까지 헛되게 보낸 시간을 만회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진인사대천명을 생각하면서,,, 운명의 종로 모의고사를 치루게 된다.


▲ 11월 2일날 치룬 종로 모의고사를 치루고 나서 그 날 밤 학교 열람실에서 쓴 일기, 2년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꺼내 본 그 때의 일기장은 맞은편의 일기와 비벼져서 종이 곳곳이 검게 되어 있었다. 11월 달에 치루는 모의고사들은 학교 측에서 성적표 처리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반수 할 때도 삼수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시간상 성적표를 발송하고 다시 받아내는 것이 2주가 남은 상태에서 큰 의미가 없어서 학교에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한다. 대신 그 흔적은 나의 머리속에, 가슴 속에, 그리고 이렇게 일기 속에 담겨 있다.

시험을 치고 가채점을 했을 때의 그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직접 볼펜으로 매기면서 나온 점수들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날의 대박은 예견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번도 영어듣기 만점을 받아보지 못하고 헤매던 내가 영어듣기가 정말 신기하도록 잘 들려서 한 번에 다 답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언어 84점, 수학 82점, 외국어 95점, 사탐 189점으로 총점 450점을 받은 것이었다,,, 시험지를 매기면서 가슴이 부르르 떨렸던 그 때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진짜 하늘에 부웅 뜬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느껴졌다,,,

가채점 종이에 각 영역 칸에 점수를 적어넣는 내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회장에서 가채점 종이를 냈다. 가채점 종이를 내고 자리에 온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고 있다가 갑자기 회장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450점 받고 이름 안 쓴 사람 누구야~ 일부러 자랑하려고 안 썼지~.” 이 말을 듣고 450점을 받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름을 안적은 게 확실했다,,,ㅡㅡ; 너무나 기쁘고 황당한 나머지 반 번호 이름을 제대로 적어넣지 않고 과목별 점수와 총점만 적어낸 것이었다. 뻘쭘한 표정을 지으면서 회장에게 가서 가채점 종이를 받아서 내 이름을 적어 넣었을 때 반 친구들이 모두 “오~”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004년 11월 2일 종로 모의고사에서의 이 점수는 말 그대로 뽀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로또를 맞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일단 언어영역이 너무 쉽게 나와서 나처럼 언어가 3~4등급 나오던 친구가 94점을 받는 등 희한한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사설 모의고사 최초로 80점을 넘긴 것이 시험이 물론 쉬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내가 9월 모의평가 이후에 꾸준히 해온 하루 2시간의 독서가 큰 힘이 된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리고 수학의 경우에는 적중 모의고사라고 해서 이때까지 종로에서 올해 출제한 문제들도 간간이 섞여 있는 것이라서 오답노트를 충실히 복습한 내가 좀더 맞은 것이었다. 여기서 외국어 95점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는다,,, 이상하리라 만큼 K교주님의 리딩스킬이 잘 먹혔다,,,-0- 듣기도 한 번에 퍼펙트하게 들렸고,,, (물론 듣기 공부는 거의 매일 했으나 한 번도 영어듣기 만점은 없는 상태였는데 받은 만점이라서 너무 기뻤다.) 나는 그 이후로 삼수를 해서 9월 모의평가를 치르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외국어 95점을 넘지 못했다,,, 그 만큼 이 날의 시험은 하늘이 나에게 그 동안의 노력을 한 번쯤은 보답 받으라고 일부러 도와주신 것 같았다,,,

정말 하늘이 날아갈 것 같은 기세가 생겼다. 수능에서 대박 받을 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험이 두렵지 않아졌다,,, 하지만 뽀록은 역시 뽀록일 뿐 다음 시험에서는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시험은 11월 4일 대성이었다. 이 역시 성적표 처리를 하지 않은 시험이었는데 이 시험에서 언어 84점, 수학 81점, 사탐 178점, 외국어 72점으로 총점 415점을 기록하게 된다. 수학이 2연속으로 잘 찍은 덕분인지 아무튼 뽀록이 났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11월 달 시험은 수험생들 약간 쉽게 낸다.) 외국어는 심각하게 테러를 입었다,,, 역시 종로에서 받은 95점이 뽀록임을 그대로 드러냈다,,,-0-;;

하지만 나는 K교주님을 끝까지 믿고 신봉하면서 이미 친구와 함께 돈을 내어서 피니싱 터치까지 수강신청을 했던 상태였고 마지막까지 믿고 공부하기로 하였다. 언어는 두 번 연속 80점대를 넘겼다. 시험이 쉬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서를 통해서 글을 읽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고 문학을 접할 때 느끼는 실력이 향상된 느낌을 뚜렷하게 받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제발 언어 인강, 학원 그만두시고 지금부터 판타지든지 무협이든지 좋으니까 독서를 하시기 바란다. 물론 읽는 책이 좀더 도움이 되는 책이면 좋다. 그렇다면 우리 반에서 판타지로 대각선 읽기로 속독(빠르게 읽음과 동시에 정확하게 이해하는 수준)에 달인이 된되어 명문대를 간 친구처럼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남은 10여 일을 정신없이 보냈다,,, 오답노트를 정리한 것을 복습을 하고 새로운 것은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정말 정신없이 공부를 한 거 같았다,,, 당시의 우리 반 공부 분위기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정말 ‘쥐죽은듯 조용하다’는 표현은 바로 그럴 때 쓰이는 말 같았다,,,

마지막 시험은 11월 9일날 치루는 정일 모의고사였다. 학교 측에서는 정일학원 시험이 문제질이 안 좋아서 안치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이 수능을 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실전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모의고사를 신청하였다고 하였다. 이번 것 역시 컴퓨터로 성적처리 없이 시험을 치루었는데 이 시험에서 언어 88점, 수학 71점, 외국어 90점, 사탐 185점으로 총점 434점을 받게 되었다. 언어가 물론 평소보다 쉽게 나온 느낌이 들었지만 점수가 좋아서 기분이 좋았고 외국어도 공부한 만큼 나온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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